한기채 중앙성결교회 목사와 남전도회 회원들이 지난달 30일 선교사 안식관에 보낼 김치를 만들고 있다.
아무리 좋은 성품 지녔어도 용기 없으면 빈껍데기
흔히 용기를 겁이나 두려움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암벽을 아무 보호장구 없이 오르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용기를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저항해 극복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용기는 두려움이나 공포가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더욱 소중한 가치를 위해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내는 것입니다.
용기는 아는 것을 실행하는 힘용기는 우리가 가진 좋은 덕성에 실제적인 힘을 불어넣는 성품입니다. 용기가 동반되지 않는 좋은 성품이란 빈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영국 정치가 윈스턴 처칠도 용기를 으뜸가는 덕목으로 봤는데, 용기가 있어야 다른 좋은 성품이 드러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현대인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갖고, 더 좋은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이 많은 정보와 지식이 실제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선 반드시 용기가 필요합니다. 역사에 족적을 남긴 위인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을 현실에서 실천한 실행력, 즉 큰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서 킹, 안중근 의사같이 윤리·정치적 용기가 있었던 사람이 있고, 모세, 다니엘, 마르틴 루터, 주기철 목사처럼 신앙적 용기가 있던 이들도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세상은커녕 자신조차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데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용기의 근원은 하나님의 임재 약속여호수아 1장에는 새롭게 이스라엘 영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준 말씀이 나옵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없는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하는 사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을 느끼던 젊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용기를 주십니다.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준 말씀은 사명과 하나님이 늘 그와 함께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수 1:9) 자신감을 뜻하는 영단어 컨피던스(confidence)는 ‘함께’라는 뜻의 컨(con)과 ‘믿음’이라는 뜻의 피드(fid)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감(용기)은 누군가가 자기와 함께임을 믿을 때 생깁니다. 하나님의 임재 약속 안에서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창조주이며 구원자인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한다면 세상에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더구나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고 믿을 때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용기를 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 있기 때문입니다.용기는 이기심을 넘어서는 능력적지 않은 이들이 머리로는 옳은 일을 위해, 혹은 타인을 돕기 위해 용기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유는 용기를 냈다가 입을지도 모르는 크고 작은 손해와 관련이 있습니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려다 내가 해를 입지는 않을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우려다 내 시간이나 재물에 손실을 보는 것은 아닐지 걱정합니다. 이런 이기심과 갈등에 사로잡히면 용기를 내야 할 때를 놓치기 쉽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말입니다. ‘자기에게 득 될 것 없는 일에 용기를 내는 것은 미련하다’고 조롱하는 사회 풍조에 휩쓸려 옳지 못한 일을 목격하고도 침묵으로 동조한 적은 없었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타적인 용기를 내야 합니다. ‘행함의 죄’도 있지만 ‘행하지 않음의 죄’도 있습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본성을 거슬러 올바른 일,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고 실행하려면 참으로 의로운 용기가 필요합니다.용기의 표상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예수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용기의 표상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죽음, 그보다도 십자가가 두려움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죄인의 누명을 쓰고 사람에게 비난받으며, 사랑하는 제자들의 배신까지 겪어내야 하는 그 모욕과 수치가 두려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용기 있게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셨고,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세상의 모든 권세를 주겠다던 사탄의 유혹, 치유와 이적을 보고 구름떼처럼 몰려들던 대중의 환호와 지지,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이 땅의 왕이 돼 주기를 바랐던 제자들의 기대를 모두 물리친 용기였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자기초월적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린다는 약속을 믿었으며, 아버지가 준 고귀한 인류 구원의 사명 때문이었습니다.하나님 없는 용기는 만용입니다. 만용은 자기 자신을 파괴할 뿐입니다. 주 안에서 참된 용기를 갖고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또한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예수님처럼 다윗처럼 느헤미야처럼 다니엘처럼 용기 있게 살아갑시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세상에 충만해 그곳을 정복하며 다스려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땅끝까지 증인이 돼야 할 자입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미 3:8)[출처] -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