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던 나다나엘
요한복음 1:43-51
나다나엘은 공관복음에 나오는 바돌로매와 동일인물일 것입니다.
나다나엘(‘하나님의 선물’) 이 본명이요 바돌로매(‘돌로매의 아들’)는 별명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찾기까지의 과정과 찾은 뒤에 나다나엘에게 나타난 변화를 보면서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는 조건과 변화를 살펴봅니다.
▶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빌립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나다나엘에게 달려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됨됨이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소재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그들은 서로 영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종교적인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반박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다나엘의 고향인 가나와 나사렛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입니다.
당시 나사렛은 30여 가구 150여명의 사람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촌동네에서 이스라엘의 소망 메시야가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해서 명문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인품과 외모가 탁월한 사람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때때로 인간의 기대에 어긋나게 역사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 빌립은 결코 나다나엘과 논쟁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와서 보라.”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진다는 말이 있는데, 빌립은 지혜롭게도 논쟁이나 설복으로 제압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맡겼습니다.
빌립의 평소의 성품과 행실을 알기에 나다나엘도 미심쩍어 하면서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오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절).
예수님은 전지하신 신적인 능력을 지니신 분으로 사람 안에 있는 것 중 좋은 면을 보십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인데 나다나엘은 참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하나님보시기에는 “아닌” 자들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궁극적인 평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깜짝 놀라하는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8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고 묵상했습니다.
외식적인 바리새인이 길거리나 회당에서 소리 높여 자기 의의 기도를 드렸지만 그는 은밀히 계신 하나님과 교제했습니다.
내면에 풀리지 않는 죄의 문제로 하나님과 독대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에게는 기도와 묵상의 비밀스런 방, “무화과나무”가 있습니까?
나다나엘은 신앙고백을 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야 되심을 인정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하고 부인하던 그가 “랍비”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의 신앙고백은 베드로나 수가성의 여인보다 훨씬 앞선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비로소 그의 인식의 지평은 확대되고 선입견과 편견에서 벗어나 올바른 신앙고백을 드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더 큰 것을 보여주시겠다 하셨는데 “하늘이 열리고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
즉 하늘과 땅의 중보요 사닥다리 되신 예수님을 보게 해주시겠다가 하셨습니다.
▶ 그는 이후에 브릿지아, 히에라폴리스, 중앙아시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인도까지 가서 선교하다 AD44년에 칼로 베임 받아 순교했습니다.
▶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무화과나무 밑에서 발견하셨고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몸을 드리는 ‘하나님의 선물’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