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마음
누가복음 15:20-32
데릭 레이몬드라는 육상선수는 올림픽 메달 유명주였는데 경기 도중 다리 인대 파열로 경기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울면서라도 코스를 완주하려 할 때 한 난입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였습니다. 중도에 포기시키려 했지만 아들의 뜻이 완강하자 “그러면 나와 함께 뛰자”라고 하면서 결승점을 통과했습니다.
▶ 신자도 아닌데 미션스쿨에 다닌다는 이유로 예배를 드렸는데,
설교 말씀을 통해서 나오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마치 나의 어머니와 닮았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희생, 수고, 헌신, 사랑, 배려, 인내, 기다림 등이 말입니다.
▶ 한 소년이 가출하여 비행을 저지르다 소년원에 수감되었습니다.
소년이 원망과 저주로 소일 하자 교도관이 그에게 참새를 주면서, 그것을 어른 참새로 키우면 석방 시켜 주겠노라 했습니다.
소년의 바람과 반대로, 어린 참새는 줄을 끊고 도망가려고만 했습니다.
결국 포기한 그에게 교도관은 어미새의 사랑의 줄을 끊으려는 참새가 바로 ‘너’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무학(無學)의 어머니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데도 말입니다.
본문은 ‘탕자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지만 ‘세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작은 아들, 큰 아들, 그리고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이 시간에는 ‘아버지의 이야기’로 읽고자 합니다.
사실 큰 아들이든 작은 아들이든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몰라 주니 불효를 한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면서 돈도 탕진하고 허랑방탕하게 살았으니 아버지가 자기를 미워할 것이고
다시는 자식으로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멀리 나아갔고,
큰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으니 더 좋은 대우를 받아야 하고 작은 아들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아버지가 못 마땅하고,
거지 꼴이 되어 돌아온 동생을 받아들이는 아버지를 이해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사실 두 아들 모두 잃어버린 아들입니다. 작은 아들과는 물리적인 거리가,
큰 아들과는 심리적인 거리가 있어 친밀감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방탕과 자만, 이것이 진정한 자녀가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작은 아들을 닮았든지 큰 아들을 닮았든지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 아버지(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당신은 누구를 닮았습니까?
작은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달려나가 환영하고 포옹하고 입을 맞추며,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와 신발을 신겨줍니다.
이는 지체 있는 어른이 할 행동이 아닙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깊은 애정과 기쁨, 그리고 배려와 용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큰 아들과 협의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잔치 자리를 배설합니다.
한시도 미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유일한 관심은 체면도, 물질도, 평판도 아니라 오직 아들뿐입니다.
▶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에 보면 주인공은 아버지로서 눈이 멀어 있는데,
육신의 눈이 멀고 영의 눈이 떠져 있음과 사랑에 눈먼 사랑의 아버지 상을 보여줍니다.
돌아온 둘째 아들을 두 손으로 쓰다듬고 있는데, 왼손으로는 붙잡아 주고 오른손으로는 어루만져줍니다.
부성과 모성을 함께 느끼게 해주는 손의 형상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위에 한 줄기 빛이 쏟아지는데 이는 아버지의 사랑만이 진정한 소망임을 나타냅니다.
▶ 사실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는 아들을 억지로 붙들어 매어놓지는 않습니다.
자유롭게 풀어 주되 돌아오기만 기다립니다.
아버지를 떠나면 고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아들이 돌아온다면 그를 마음을 다해 받아들일 것입니다. 아버지는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나간 자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가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은혜에 의해서일 뿐입니다.
▶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이 이야기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자녀들이 아버지의 마음,
어머니의 마음(사 49:15~16)을 알아 달라는 것입니다.
돈도, 성공과 실패도, 잘 살고 못사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과 그분의 무한한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다리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베푸시고,
모두 다 사랑하시는 그분에게 돌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