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을 위한 부정
빌립보서 2:5-11
사순절은 부활절 전 40일로서, 부활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자기 부인과 회개’의 기간으로 영적으로 준비하므로, 하루(부활절)를 위한 40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간 기독교인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함께 부활하기 위해 예수님과함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렇게 사순절은 ‘고난의 기간’이라는 성격을 지닙니다.
▶ 성경에서 고난은 ‘광야’로 상징됩니다.
광야가 무조건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광야는 생명을 잉태하고 사람을 훈련시키며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시공(時空)입니다.
“하나님은 좌절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신다. 승승장구하던 삶이 실망의 장벽에 부딪혀 산조각 나면, 비로소 우리는 좌절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다.
하나님은자신의 보물을 어둠 속에 숨겨두신다. 아무리 찬란한 별도 밤이 되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오스왈드 챔버스). 모세, 다윗, 세례 요한, 예수님, 사막교부들 모두 광야를 먼저 체험해야 했습니다. 광야의 본질은 자기 부인, 내려놓기일 것입니다.
고난은 또한 ‘십자가’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현대의 기독교는 ‘긍정적인 사고방식’만을 전파했을 뿐, 광야나 십자가를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에는 죄도, 회개도, 용서도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기독교 진리의 본질은 영광과 은혜 이전에 광야(십자가)를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긍정(肯定)을 위한 부정(否定)’의 단계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의 은혜는 값싼 은혜로 전락합니다. 기독교는 결코 긍정을 위한 긍정이나,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닙니다.
나는 나를 부정하고 하나님은 나를 긍정해주셔야 온전한 긍정이 됩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한 이사야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처럼, 하나님 앞에 자기 부인의 과정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사순절은 부활의 긍정을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부정의 과정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 마귀의 길은 부정 없이 곧바로 긍정으로 나아가려는 데에 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뛰어 넘어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인 영광의 지름길을 제시하고 유혹하려 했습니다. 부활은 필연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필요로 하는데 말입니다.
빌립보서 2장은 바울의 기독론을 담고 있는데, 긍정을 위한 부정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지니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더욱 자신을 부인하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는 자세를 견지하다 결국은 모든 인간이 꺼리는 십자가의 처형까지 감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부인과 낮춤은 하나님에 의해서 긍정 됩니다.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를 지심과 죽으심은 자기 부정으로 볼 수 있고,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심은 긍정입니다.
▶ ① 회개라는 것도 역시 긍정을 위한 부정의 단계입니다.
성공 이미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본성 때문에 회개하기 힘들지만 이런 단계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그를 부정하시게 될 것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십자가와 부활” 처럼 부정과 긍정의 세트입니다.
② 비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더 좋은 것으로 채움 받기 위해서 자신을 먼저 비워야 합니다.
기독교의 비움은 다른 종교처럼 비움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채움 받기 위해서입니다.
③ 8복도 더 좋은 것을 위한 자기를 부정하는 궁극적인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 부정(否定)의 대명사로서의 ‘십자가의 도’는 일회성의 통과 의례가 아니라 하늘나라를 향한 도로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매일” 죽어야 하나님의 매일 살리심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분이 아닙니다.